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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독서

[독서] 박지향, 김철, 김일영, 이영훈의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권, 2권 책 후기

by 다비니 2022.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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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12번째 책, 박지향, 김철, 김일영, 이영훈의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권, 2권'

1권(2022년 2월 16일~6월 22일), 2권(2022년 6월 22일~6월 25일)

한국사에 관심이 많은 필자는 우연히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을 보게 되었고,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책을 구매하였다.

1권은 750쪽이 넘고 2권은 695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책이다. 

1권은 2월부터 읽기 시작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많이 못 읽다가 본격적으로 6월부터 읽기 시작했고, 2권은 3일 만에 읽었다.

1권보다는 2권이 더 개인적인 관심사에 가까운 주제들을 많이 다루었다. 원래 책을 다 읽으면 중고로 팔 생각이었으나 2권을 읽고 개인 소장을 하기로 했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책 소개

출처: 인터파크 도서, 교보문고

1979년에 처음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전6권)의 역사적 평가에 반박하며 뉴라이트 진영에서 내놓은 책으로, 진보와 보수 양진영의 논쟁을 초래한 화제작이다. 실증주의와 탈민족주의라는 관점을 제시하면서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고 있다.

이 책은 좌편향적인 역사서술과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난 새로운 연구 성과를 제시하며, 일제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일상사의 문제에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는 30편의 글과 편집위원의 대담 1편을 전해준다. 친일과 민족주의의 문제, 일제 잔재의 단절과 연속, 해방 정국과 대미 관계, 분단과 한국전쟁, 1950년대와 이승만 정부에 대한 재평가 등을 논하고 있다.

 

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인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70년대 박정희 정권까지 우리 역사는 반공 이데올로기 중심의 우편향적인 시각에서 서술되어왔다. 1979년 첫 권이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전6권, 이하《해전사》)은 1980년대 민주화투쟁 시기를 대변하는 책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시각을 민중사관 중심으로 획기적으로 전환시켰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출간된 지 3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학계에서는 민족 지상주의, 민중혁명론 등《해전사》에서 제기된 여러 주장에 대해 많은 문제가 제기되어왔다. 이번에 책세상에서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하《재인식》)은 그간 학계에 축적된 해방 전후사의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해전사》로 대표되는 기존 역사서의 좌편향적인 역사서술을 바로잡고 보다 다각적이고 실증적으로 우리 역사를 논하고자 한다.

《재인식》은 특정 이념을 표방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이분법적 시각이 아니라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해방 전후사를 ‘재인식’해보자는 의도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난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발굴했으며, 일제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일상사의 문제에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는 머리말을 포함한 30편의 글과 편집위원의 대담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집위원 박지향(서울대, 서양사), 김철(연세대, 국문학), 김일영(성균관대, 정치외교학), 이영훈(서울대, 경제사)을 중심으로 카터 J. 에커트(하버드대학, 한국학), 기무라 미쓰히코(아오야마가쿠인대학, 국제정치경제학) 등의 외국 학자들뿐만 아니라, 이완범(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 신형기(연세대, 국문학) 등 《해전사》의 필자였던 학자들까지 참여함으로써 이념을 떠나 역사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시각을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친일과 민족주의의 문제, 일제 잔재의 단절과 연속, 해방 정국과 대미 관계, 분단과 한국전쟁, 1950년대와 이승만 정부에 대한 재평가 등을 논하고 있는 《재인식》은 우리 현대사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보여주는 새로운 연구성과의 결정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기존의 역사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보다 비판적인 안목과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민족 지상주의에 칼날을 들이대다

《재인식》은 먼저 민족 지상주의가 우리 역사 해석에 미친 폐해를 지적한다. 민족이 다른 모든 가치들을 압도하는 민족 지상주의는 애국심과는 다른,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이념이다. 최근 황우석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사회는 민족의 이익을 최고의 선(善)으로 간주하며 이와 관련된 문제에서는 극렬한 파시즘적 행태를 보인다.

 

이러한 극단적 행태는 역사를 보는 시각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재인식》은 우리 사회의 민족주의적 역사 해석에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편집위원 박지향은 머리말에서 “우리 민족은 대단히 우수한데 다른 나라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식민 지배와 민족 분단의 비극을 겪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말자”는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남을 탓하기 전에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의 공과(功過)를 정확히 따져 공정하게 봄으로써 과거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것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인식》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권은 해방 전사(前史)이며, 2권은 해방 후사(後史)로 구분된다. 식민지하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1권은 총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식민지하의 일상적인 삶, 예를 들면 당시의 투기 열풍, 1인당 소득과 소비 행태, 근대 도시의 일상문화에서부터 당시 조선인 위안부와 정신대를 중심으로 한 여성의 삶, 친일의 문제를 여전히 안고 있는 식민지하의 지식인의 삶, 그리고 식민지 말기 조선의 총력전, 조선인의 정치 참여에서 이어지는 공산주의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를 논하고 있는 2권은 냉전 과정 속에서의 한반도 분단 문제와 대외 세력과의 관계 등을 통해 해방 공간의 사회를 살피고, 한국전쟁과 한미동맹,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 해체를 중심으로 당시 농촌 사회의 사회상을 고찰해보며, 해방 이후의 역사를 거시 담론뿐만 아니라 민중의 일상사라는 미시사의 관점에서도 접근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은 근대 사회였는가

《재인식》은 일본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이 조선 사회와 조선인의 삶에 미친 이중적 효과를 추적한다. 일제가 35년간 조선을 지배한 목적은 ‘영구병합’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지배 정책은 ‘내선일체’라고 불린 동화 정책이었다. 조선을 영구히 병합하기 위해 일제는 일본의 법과 제도를 조선에 이식했고, 그 결과 조선은 법치가 성립한 근대 사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피지배자로부터 동의를 구하지 않은 권력인 식민지 권력의 법치는 진정한 의미의 근대가 아니었다. 조선인에게는 정치에 참여할 권리와 기회가 없었다. 총독부는 자신의 전통 사회와 문화를 지키고 나아가 정치적으로 독립하고자 했던 조선인의 자연적 권리를 짓밟았다. 그 점에서 식민지 권력은 생경한 폭력이었다. 이 같은 식민지 권력의 이중적 성격, 즉 한편에서는 근대적 법치로써 사회를 규율하는 정당한 폭력체이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의 자연권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부당한 폭력체로서 기능하는 모순적 관계를 잘 지적하고 있는 것이 이철우(성균관대, 법학)의 〈일제하 법치와 권력〉이다.

식민지 시기에 관한 인식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문제점은 경제 영역이다. 1910~1940년간 세계 자본주의가 침체와 위기를 겪는 동안 조선은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였고 산업 구조도 근대화했다. 김낙년(동국대, 경제학)의 〈식민지 시기의 공업화 재론〉은 이러한 식민지 경제의 양적 성장과 질적 발전을 최근의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그러나 식민지 경제의 발전을 조선 경제의 발전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조선의 경제 발전은 일본으로부터의 자본 유입과 일본으로의 쌀 수출로 가능했고, 따라서 경제 발전은 일본인 자본가와 일본인 지주들을 살찌웠다. 그러나 그 성장의 과실을 모두 일본인이 차지하고 조선인은 거기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주익종(서울신용평가정보 평가사업본부 이사)의 〈식민지 시기의 생활수준〉은 이러한 수탈론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당시 식민지의 일반 대중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한편으로는 근대 문명이 주는 해방감이나 활기를 만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문명의 주체가 되지 못한 식민지인의 무기력감과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신명직(구마모토가쿠엔대학, 동아시아학)의 〈식민지 근대도시의 일상과 만문만화〉는 ‘만문만화(漫文漫畵)’를 통해 근대도시 경성을 향유하고 있는 경성 사람들의 일상과 이중성을 리얼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경성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한수영(동아대, 국어국문학)의 〈하바꾼에서 황금광까지―채만식의 소설에 나타난 식민지 사회의 투기 열풍〉은 미두와 금광 개발을 둘러싸고 전국에서 벌어진 투기 붐을 그린 채만식 〈탁류〉와 〈금의 정열〉을 통해 당시 시대상을 실감나게 재생하고 있다.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식민지 유산은 무엇인가

이 책은 해방 전사와 해방 후사를 연결시키는 인간군, 이를테면 박정희와 같은 인물들이 성장한 사실에서 식민지 유산을 찾아낸다. 카터 J. 에커트의 〈식민지 말기 조선의 총력전·공업화·사회 변화〉는 제도와 인적 자본의 측면을 넘어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 20세기에 한국인들이 경험해야 했던 일련의 전쟁의 연속선상에서, 식민지 시기와 해방 후를 연결하는 인간군이 성장해왔음을 설명한다. 중일 · 태평양전쟁기에 조선에서 전개된 대규모 군수공업화는 조선인 노동자 · 기술자 · 기업가 · 관료 집단을 성립시켰다. 또한 에커트는 정부 주도형이라는 1960년대 이후 경제 시스템의 기원도 총독부가 주도한 식민지 공업화의 경험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식민지 권력이 조선을 근대화시켜주었다는 논리는 아니다. 그보다는 그때 시행된 개발 정책의 기본 개념이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 시행한 개발 정책의 모델이 되었고, 그것이 1960년대 이후 복원 내지 답습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제가 전시기에 구축한 통제경제 체제가 해방 후 북한에서 거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계승되었음을 밝힌 기무라 미쓰히코의 논문과 함께 남북한 모두에서 식민지와의 단절보다는 연속이 지배적이었음을 보여준다.

한국전쟁과 분단의 책임

지금까지는 이승만과 미군정에 분단 책임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광복 직후 통일의 기회였을 신탁통치안을 남한의 우파들이 반대했을 뿐 아니라,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할 의향을 밝힌 최초의 인물이 이승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정식(펜실베이니아대학 명예교수)의 〈냉전의 전개 과정과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스탈린의 한반도 정책, 1945〉는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공개된 소련 문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이승만이 단독정부를 수립할 의향을 밝히기 전인 1945년 9월 20일에 이미 북한의 소련군정에 북한에 독자적인 행정 기구를 구축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 또한 김영호(성신여대, 정치외교학)의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 정치적 재해석―스탈린의 롤백 이론〉은 소련 문서를 통해 한국전쟁이 미소 냉전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기 위한 스탈린의 세계 전략에 기인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스탈린은 중소방위조약을 체결한 다음, 미국의 봉쇄선 38선을 돌파하여 남한을 소련의 영향권으로 편입함으로써 미국의 국제 위신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스탈린의 세계 전략을 부추긴 것은 김일성의 무력통일 의지였고, 여기에 중국의 참전 의지가 전달됨으로써 한국전쟁이 실천에 옮겨진 것이다.

대담―해방 전후사의 새로운 지평

 

《재인식》의 취지와 목표는 편집위원(박지향 · 김철 · 김일영 · 이영훈)의 대담을 엮은 제9부 〈대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궁극적으로 한국 사회의 역사 인식에서 특정한 ‘이미지’를 걷어내려 한다. 고대사든 일제시대든 해방 이후사든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은 특정한 이미지에 구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를 규명하고 그 과오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주어진 이미지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실과 마주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단 하나의 잣대로 환원시키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대단히 복잡하고 다층적이고 다원적인 것이고, 따라서 여러 개의 잣대를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 즉 《재인식》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객관적 역사 해석, 일국사적인 관점이 아닌 비교사적인 관점에 의한 역사 인식을 통해 우리 역사에서 다층적이고 다원적이고 복잡한 삶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

 

1권 목차

머리말 11쪽

1부 | 식민지하의 일방적 삶

- 왜 다시 해방 전후사인가 (이영훈) 25쪽

- 하바꾼에서 황금광까지 - 채만식의 소설에서 나타난 식민지 사회의 투기 열풍 (한수영) 64쪽

- 식민지 시기의 생활수준 (주익종) 107쪽

- 일제하 법치와 권력 (이철우) 145쪽

- 식민지 시기의 공업화 재론 (김낙년) 188쪽

- 식민지 근대 도시의 일상과 만문만화 (신명직) 229쪽

2부 | 식민지하의 여성의 삶

- 상하이의 일본군 위안소와 조선인 (후지나카 다케시) 295쪽

- 친일 문학의 또 다른 층위 - 젠더와 <야국초> (최경희) 387쪽

- 교육받고 자립된 자아실현을 열망했건만 (소정희) 434쪽

3부 | 식민지하의 지식인의 삶

- 몰락하는 신생 - ‘만주’의 꿈과 <농군>의 오독 (김철) 479쪽

-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 (조관자) 524쪽

- 한글 운동과 근대 미디어 (이혜령) 556쪽

4부 | 단절과 연속

- 식민지 말기 조선의 총력전, 공업화, 사회 변화 (카터 J. 에커트) 601쪽

- 식민지 시기 조선인의 정치 참여 (나미키 마사히토) 655쪽

- ‘신인간’ - 해방 직후 북한 문학이 그려낸 동원의 형상 (신형기) 698쪽

- 파시즘에서 공산주의로 - 북한 집산주의 경제정책의 연속성과 발전 (기무라 미쓰히코) 737쪽

찾아보기 765쪽

 

2권 목차

5부 | 해방 공간

냉전의 전개 과정과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스탈린의 한반도 정책, 1945│이정식

해방 직후 국내 정치 세력과 미국의 관계, 1945~1948│이완범

한국의 노동 운동과 미국, 1945~1950│박지향

해방 공간의 사회사│전상인

6부 | 한국전쟁과 한미동맹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 정치적 재해석―스탈린의 롤백 이론│김영호

전시 정치의 재조명―부산 정치 파동의 다차원성에 대한 복합적 이해│김일영

이승만과 1950년대의 한미동맹│차상철

7부 | 농지개혁과 농촌 사회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의 해체│김일영

농지개혁―지주제 해체와 자작농체제의 성립│장시원

1950년대 한국 농촌의 사회구조│이만갑

8부 | 잃어버린 10년을 찾아

거시적으로 본 1950년대의 역사―남한의 변화를 중심으로│유영익

비합리성 이면의 합리성을 찾아서―이승만 시대 수입대체산업화의 정치경제학│우정은

1950년대 후반 미국의 대한 정책│이철순

9부 | 대담

해방 전후사의 새로운 지평│박지향 · 김철 · 김일영 · 이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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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저자소개

박지향

기무라 미쓰히코(木村光彦)_아오야마가쿠인대학 국제정치경제학부 교수

김낙년_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김영호_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일영_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철_연세대 국문학과 교수

나미키 마사히토(竝木眞人)_페리스여학원대학 교수

박지향_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소정희_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 인류학과 교수

신명직_구마모토가쿠엔대학 동아시아학과 교수

신형기_연세대 국문학과 교수

우정은_미시간대학 정치학과 교수

유영익_연세대 국제학대학원 한국학 석좌교수

이만갑_서울대 명예교수

이영훈_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이완범_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이정식_펜실베이니아대학 명예교수,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객원교수

이철순_부산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철우_성균관대 법과대학 교수

이혜령_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강사

장시원_한국방송대 경제학과 교수

전상인_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조관자_주부대학 인문학부 교수

주익종_서울신용평가정보(주) 평가사업본부 이사

차상철_충남대 사학과 교수

최경희_시카고대학 동아시아학과 한국문학 교수

카터 J. 에커트CARTER J. ECKERT_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 소장

한수영_동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후지나가 다케시(藤永壯)_오사카산업대학 인간환경학부 교수

 

1부 요약

왜 다시 해방 전후사인가 (이영훈)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백두산을 예시로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적하며 역사의 정의와 역사학자의 기본적인 자질과 윤리를 논한다. 민족주의를 비판하며 1980년 후반의 ‘사회구성체논쟁’이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연결되어 그 논리가 집단 오류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에게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민족을 새로운 태극으로 하는 근본주의적 사고방식과 역사를 선과 악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종교적 “선악사관”의 함정이다.

그렇다면 해방 전후사의 새로운 출발점은 어디인가? 그는 민주적인 역사학, ‘문명사’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문명사를 통해 그는 “조선의 전통문명과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유럽 기원의 근대문명이 상호 융합하는 시대”로 재조명한다. 또한 해방, 점령, 분단, 건국, 전쟁, 복구, 한미동맹, 4.19까지 전개된 해방 전후사를 암흑과 광명의 시대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라 나라 세우기(State-building)의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바꾼에서 황금광까지 - 채만식의 소설에 나타난 식민지 사회의 투기 열풍 (한수영)

한수영 동아대 국어국문과 조교수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의 소설를 통해 “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의 변화에 대해 그 어떤 역사, 경제학, 통계학으로부터 배운 것보다 발자크한테 배운 것이 많다”고 했다는 도입부로 챕터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발자크에 견줄 만한 한국의 근대작가로 채만식을 소개한다.

한수영은 채만식의 대표작인 <탁류>와 문제작 <금의정렬>에서 그려지는 1920~1930년대의 투기 열풍인 ‘미두(현물 없이 쌀을 팔고 사는 일)’와 ‘금광’을 통해 조선 사회 일상을 재구성한다.

식민지 시기의 생활수준 (주익종)

주익종은 교착 상태에 빠져있는 식민지 시기 조선의 생활수준 악화론(또는 정체론)과 개선론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키고자 1인당 소득과 소비, 영양 상태와 교육에 대한 새로운 추계치를 제시한다. 그는 식민지 시기 조선인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조선인의 만족도가 높아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명확히 하고, 일제하의 경제생활에 관한 더 생산적인 논의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하 생략

 

1권 책속으로

출처: 알라딘

민족주의는 본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이념이다. 그것은 자기 민족의 우월함을 주장하고 증명하기 위해 다른 민족들을 깎아내려야 하는데, 이 점에서 민족주의는 굳이 배타적일 필요가 없는 혈육이나 고향에 대한 애정과 구분된다. 우리 역사에서 특히 민족 지상주의가 야기하는 문제점은 첫째, 그것으로는 고난의 우리 현대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민족은 대단히 우수한데 다른 나라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식민 지배와 민족 분단의 비극을 겪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말자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남 탓을 하기 전에 우리 잘못이 무엇이었나를 자성해야 하고, 그럴 때 우리가 참으로 많은 것을 잘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100년 전, 국가의 생존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위정자들은 무엇을 했는지, 사회 지도층은 또 무슨 노력을 했는지에 생각이 미칠 때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지난 100년 전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는 이유는 다시는 그런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서이다.

- 이영훈 13-14

한국의 역사가들은 특히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20세기 전반기에 관한 역사 쓰기에 있어서 실증의 자세를 쉽게 포기한다. 그들은 일제를 비판하기 위히서라면 사료의 뒷받침 없이 어떠한 주장도 펼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태도는 1960년대 중반부터 중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에서 뚜렷이 관찰된다. 예컨대 1964년부터 역사교육연구회라는 역사가 단체가 지은 국사교과서는 어떠한 근거도 없이 일제가 토지조사사업(1910-1918) 과정에서 전국 토지의 절반이나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이 대목은 1967년 다른 역사가에 의해 40퍼센트로 고쳐진 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내가 비판을 제기한 것이 1992년의 일인데도 지금까지 13년이 되도록 그 오류는 방치되고 있다. 또 국사 교과서는 조선과 일본이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된 가운데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수출된 것을 두고, 쌀을 빼앗아 실어 나른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 이영훈 39-40

2005년 현재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조선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1912년 0.77석에서 1930년 0.45석으로 42퍼센트나 감소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과장된 것이다. 낙성대 경제 연구소 작업 팀의 추계에 의하면 곡물 소비량은 1912-1939년에 12퍼센트 가량 감소했다.

이러한 곡물 소비량의 감소는 곧바로 식량 소비량의 감소로 해석되어 생활수준 악화의 명백한 증거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여타 식품의 소비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감자, 고구마의 소비 증가를 더하면 1912-1939년 사이에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은 8퍼센트 감소한 것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여타 식품의 소비가 급증했다. 예컨대 1인당 육류 소비는 1.2배로 소채과실은 2.6배로 어패류는 3.3배로 장류는 1.5배로 증가했으며, 기타 가공식품은 1.6배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보강된 칼로리를 더하면 1인당 총 칼로리 섭취량은 거의 감소하지 않았다고 하겠다.

- 주익종 128-130

일제 사법 제도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과 일어를 사용하는 법정의 높은 문턱, 1930년대에도 전국의 변호사가 400명을 넘지 않았을 정도로 적은 법률 서비스 인력 등을 생각하면 당시 국민들이 법원을 이용한 빈도가 얼마나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1928년과 1937년의 소송 빈도를 보면 각각 인구 330명당 1건과 428명당 1건을 기록하여 오히려 1950년대와 1960년대보다 높았으며, 1970년대 중엽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지방의 최하급 법원 중 하나로 전남 동부 5개 군, 인구로는 40-50만 정도를 관할한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의 예를 보자. 이 법원은 1928년과 1937년 각각 인구 364명당 1건, 380명당 1건의 소송을 수리했다. 이 법원의 소송물 가액 상한은 1000원이었는데, 여기에서 다룬 사건 중 68퍼센트가 100원 이하였고 500원 이상의 사건은 6퍼센트에 불과했다. 이 법원 관할 지역에서 활동한 변호사는 한 시점에 5명을 넘지 않았는데, 전체 판결 사건의 82퍼센트가 원피고 모두 변호사 없이 진행되었다.

- 이철우 180

북한 지역에는 전력과 화학, 제철 공업이 발달했으며 특히 전시에는 군수공업으로 전용할 수 있는 중화학공업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 결과 북한은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공업 지대로 변모해 있었다. 이 생산 설비는 전쟁 피해를 거의 입지 않고 소련 점령군의 손을 거쳐 김일성 정권으로 이양되었다. 그리고 일본인 기술자를 억류하는 방식으로 생산력을 유지하고 기술의 강제 이전을 시도했다. 이것은 결국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는 데 물적 기반이 되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 제국의 전쟁 준비는 김일성의 전쟁 준비로 직결되었던 것이다.

- 김낙년 226

 

2권 책속으로

출처: 알라딘

(미군 책임자) 하지의 정치 고문 베닝호프는 (1945년) 9월 15일자 보고서에서 남한을 '점화되기만 하면 즉각 폭발할 화약통'으로 묘사하면서 한국은 완전히 선동의 무대로 화했으며 수백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유일하게 고무적인 요소라고 지적했다. 이들 보수주의자들 중 많은 수가 일제에 협력했지만 그러한 오명은 점차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 섞인 판단도 덧붙였다. (중략) 하지는 1948년 2월 유엔 한국 임시위원회에서 "남한에 도착한 후 미군은 남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지도하에 활동하고 있는 인민위원회를 보게 되었는데, 그들은 완전히 조직화되어 있고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중략)1945년 10월 10일 (미군정청 장관) 아널드는 인민공화국(1945년 9월 6일 서울에서 선포.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의 구성원은 "고관대작을 참칭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하면서 "흥행적 가치조차 의심할 만한 괴뢰극"을 즉시 "폐막해야 마땅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은 인용자주]

- 이완범 82

하지를 비롯한 강경론자들은 좌익이 곧 공산주의자라는 단순 공식에 따라 행동한 것이 사실이지만 미 국무부와 군정 내 자유주의자들은 한국에서 중도 좌파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군정은 1946년 여름에 이르러 그러한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중략) 전평도 초기에는 비판적 협력 노선을 표명하며 미군정과의 관계에 조심했으나 1946년 8월 조선공산당이 신전술을 채택한 뒤 과격하고 정치적인 행동에 경도하게 됐다. 이로써 둘의 관계는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 박지향 104-105

해방된 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 한 일간지는 '긴 휴일' 동안의 '화려한 축제'를 그만 끝내고 생업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아 시내 전차가 움직이지 못하고, 청소부가 일하지 않아 변소와 쓰레기가 엉망인 점을 지적한 이 사설은 "이제 월여를 지나 그만하면 놀기도 많이 놀았고 흥분에 뛰논 것도 그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제 시대에 있었던 방화 훈련이 사라진 결과로 추정되는바, 서울 시내에서 화재 발생이 급증했는가 하면, 해방 직후 절도나 강도, 살인 등의 죄목으로 수감되는 죄수의 수도 해방 직전에 비해 두 배 가량 늘었다.

- 전상인 151

미군정이 쌀의 수급을 시장 기능에 맡기자마자 시중에서는 '풍년 기근'이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났다. 풍년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위시한 도시에서 쌀을 구경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이에 미군정 당국은 한 달도 못 가 국가적 비상 사태를 선언했고, 11월 19일에는 미곡에 대한 최고 소매 가격을 지정, 고시함으로써 쌀을 농촌 산지에서 도시 시장으로 유인하고자 했다. 그러나 쌀은 여전히 시장을 외면했다. 일반 농민의 처지에서는 다른 생필품 가격이 폭등하는 상황에서 쌀을 낮은 가격에 팔 리 만무했다. (중략)

1945년 연말에 이르러 미군정 관계자 스스로 남한 사회는 "투기와 매점매석, 밀매, 과소비, 인플레이션, 그리고 기아에 따른 난장판"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과연 1945-1946년 겨울, 서울을 위시한 대도시에서는 쌀이 거의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한겨울 혹한기 서울 한복판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으며, 밤거리에는 강도들이 횡행했다. 급기야 미군정 당국은 1946년 1월 25일, 과거 일제시대의 미곡수집령을 부활시켰다. 하지만 1945년의 추곡 강제 공출 계획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중략) 1946년 남한은 보통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관하여 대단히 '잔인한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학교와 직장의 정상 운영이 어려울 정도로 결식자들이 많았고,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이 되면 기차역 주변에서 미곡 밀매상을 둘러싸고 살인적인 쟁탈전이 벌어지곤 했을 뿐 아니라, 한강 마포 연안에서는 해적선이 출현해 지방에서 들어오는 쌀을 강탈하는 일까지 생겼다. (중략)

 

1946년도 전체 하곡 수집이 목표량의 48.7퍼센트에 불과했던 데 비해 추곡 수집이 83.5퍼센트로 비약한 것은 무엇보다도 식량 수집 과정에서의 행정 관료 및 경찰 조직의 열성적 과잉 개입 탓이었다. (중략) 마침내 1946년 가을, 혁명에 가까운 농민 봉기가 경북 일원에서 시작되어 그해 연말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 전상인 159-164

p272

마침내 미국은 이승만에게서 '휴전협전 체결 이전에 중공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반면에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한국내와 그 부근 in and around Korea'에 미군이 주둔할 것이며 방위조약을 신속하게 비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p273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해 방한한 덜레스에게 이승만은 일본이 여전히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한국 국민은 소련보다도 일본을 더욱 두려워한다고 말하면서, 미국이 일본을 군사적, 경제적으로 강화시키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며 일본의 한국 '재점령'야욕을 반드시 분쇄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p280

(1953년 12월 아이젠하워는) 주한미군 2개 사단의 조기 철수를 발표했다. '협상'이 아니라 '무력'에 의한 통일을 주장해온 이승만은 라오스와 인도차이나 반도에 한국군을 파병할 것을 제의하면서, 육군 15-20개 사단의 추가 증강을 포함한 한국군의 대폭적인 강화를 미국에 강력히 요구했다.

p283

(1954년 7월 이승만은) 전쟁 재개를 통한 한국의 통일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는 한국을 포함한 분단국가들의 통일을 위하여 미국이 개입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덜레스는 분단국가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고의적인 전쟁의 시작은 곧바로 대전으로 이어지며,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정도의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이젠하워도 미소간의 핵전쟁은 인류 문명 전체를 파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지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이승만으로서는 자신의 북진통일을 위한 의지를 결국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차상철 272-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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